목 차
1. 트로트와 엔까의 탄생: 시대의 눈물에서 피어난 음악
2. 감성의 공명: 트로트와 엔까가 노래하는 ‘정(情)’과 ‘한(恨)’
3. 오늘의 트로트와 엔까: 전통의 계승인가, 대중문화의 재해석인가
한국 트로트와 일본 엔까, 그 유사성과 차이
1. 트로트와 엔까의 탄생: 시대의 눈물에서 피어난 음악
한국의 트로트와 일본의 엔까는 모두 격동의 역사 속에서 민중의 정서를 위로하던 대중가요로 시작했습니다. 이 두 장르는 20세기 초반부터 중반까지, 각국이 근대화를 겪고 식민지와 전쟁이라는 큰 시련을 마주한 시기에 등장하여, 고통받는 사람들의 마음을 어루만지는 음악으로 자리 잡았습니다.
트로트의 기원은 일제강점기 시절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이 시기 일본의 유행가와 서양 음악의 리듬이 한국 음악에 혼합되며 트로트가 형성되었고, 초기에는 ‘블루스’, ‘롱구’ 등으로 불렸습니다. 대표적으로 1935년에 발표된 이난영의 「목포의 눈물」은 한국 최초의 대중적인 히트곡으로 손꼽히며, 트로트의 시초로 여겨집니다. 이 노래는 슬픔과 향수를 절절하게 담아내며 당시 식민지 조선인의 가슴에 깊은 울림을 남겼습니다.
해방 이후에는 남인수, 백설희, 현인 등의 가수들이 활약하면서 트로트는 본격적인 대중가요로 자리매김했습니다. 1960~70년대에 이르러서는 방송과 음반 시장을 중심으로 트로트가 황금기를 맞이하였으며, 민중의 감정창구로 기능했습니다. 당시 농촌과 도시, 이산가족과 해외동포를 아우르는 보편적인 감성을 가진 음악이었습니다.
한편, 엔까는 메이지 시대 후반부터 다이쇼 시대에 걸쳐 서양 음악이 유입되면서 형성된 일본식 대중가요입니다. 초창기에는 ‘신민요’ 혹은 ‘가요쇼카’라고도 불렸으며, 전통 민요의 선율에 서양 화성이나 리듬을 접목시키며 점차 엔까의 형태가 완성되었습니다. 2차 세계대전 이후 전후 복구기에 접어들며, 전통 악기와 서양 악기의 절묘한 조화를 통해 형식이 정립되었고, 히바리 미사오 같은 전설적인 가수가 등장하며 엔까의 전성기가 열렸습니다.
엔까는 전쟁의 폐허와 경제 불황 속에서 살았던 일본인들에게 위로의 언어였습니다. 서민들의 일상, 잃어버린 사랑, 외로움, 희망 등을 노래하면서 일상의 고단함을 음악으로 승화시켰습니다. 또한 지역축제나 가라오케 문화와도 밀접하게 연관되어, 지역 커뮤니티 속에서도 중요한 역할을 해왔습니다.
엔까의 발달은 정치와도 맞닿아 있었습니다. 일본에서는 보수적 정치세력과 엔까 가수 간의 교류가 활발했으며, 엔까를 통해 민족 정체성을 강조하려는 시도도 있었습니다. 한국에서도 트로트는 때때로 군부정권 시절 대중을 통제하는 도구로 사용되기도 했습니다. 이러한 역사적 사실은 음악이 단지 예술의 차원에만 머무르지 않고, 권력과 민중을 잇는 매개체가 되었음을 보여줍니다.
2. 감성의 공명: 트로트와 엔까가 노래하는 ‘정(情)’과 ‘한(恨)’
트로트와 엔까의 핵심은 단연코 감정입니다. 그리고 이 감정은 한국과 일본이라는 동아시아 두 나라의 정서적 차이와 공통점을 동시에 보여줍니다. 트로트는 정(情)과 한(恨)이라는 복합적인 감정을 담고 있으며, 엔까는 와비(侘び)와 사비(寂び)라는 일본 특유의 미학적 정서를 반영합니다.
트로트에서는 ‘사는 게 서럽다’, ‘그리운 사람’, ‘기다리는 사랑’ 같은 테마가 반복됩니다. 예컨대 설운도의 「다함께 차차차」는 신나는 리듬이지만, 가사에는 인생의 허무함과 견디는 삶이 녹아 있습니다. 트로트는 단순히 슬픈 노래가 아니라, 울면서 웃는 감정의 총체라 할 수 있습니다. 이는 한국인의 감성 속에 깊이 자리 잡은 공동체적 정서와 연결되어 있습니다.
엔까는 반대로 보다 절제된 슬픔과 개인적 고독에 집중합니다. 일본 사회에서 개인은 종종 사회적 역할 속에 억눌려 있고, 자신의 감정을 표출하는 데 익숙하지 않습니다. 엔까는 그런 억눌린 감정을 은유적 가사와 간결한 선율로 담아내며, 사라진 연인, 고향에서의 이별, 밤거리의 술집 등의 이미지로 공감대를 형성합니다.
가사뿐 아니라 음악의 형식도 감정 표현을 돕습니다. 트로트는 꺾기 창법과 4분의 2박자 리듬, 비교적 빠른 템포를 통해 격정적이고 직설적인 감정을 표현합니다. 반면 엔까는 3박자 계열의 느린 템포, 장식음을 활용한 여운 있는 선율로 깊은 감정을 자연스럽게 흘려보냅니다. 이는 각 나라의 미적 감각과 심성을 반영하는 것이기도 하죠.
더불어 두 장르는 노래뿐 아니라 의상과 무대 연출에서도 시대성과 감성을 표현합니다. 트로트 가수들은 전통 한복 또는 반짝이는 무대의상을 입고 무대에 오르는 경우가 많고, 엔까 가수들도 기모노를 입고 무대에 서는 모습이 익숙합니다. 이처럼 의상 하나에도 ‘전통과 정체성’이라는 메시지가 깃들어 있으며, 이는 곧 대중문화의 상징이자 기억의 장소가 됩니다.
3. 오늘의 트로트와 엔까: 전통의 계승인가, 대중문화의 재해석인가
최근 몇 년간 트로트와 엔까는 다시금 주목받으며 부활하고 있습니다. 특히 한국에서는 TV조선의 ‘미스터트롯’, ‘미스트롯’ 시리즈가 대성공을 거두며 트로트가 국민적 열풍으로 확산되었고, 전 세대를 아우르는 음악으로 거듭났습니다.
이처럼 트로트는 뉴트로(New-tro) 트렌드의 중심에 서 있습니다. 젊은 가수들이 트로트에 도전하면서 전통적인 멜로디에 팝적인 요소나 EDM, 록 등을 융합시키는 시도도 이어지고 있습니다. 임영웅은 발라드와 트로트의 경계를 넘나들며 트로트의 대중화를 주도했고, 영탁, 이찬원 등도 트로트를 하나의 장르가 아닌 감정 표현 방식으로 접근하며 다양한 음악을 시도하고 있습니다.
일본에서도 전통 엔까의 틀을 유지하면서도 다양한 융합 시도가 이어지고 있습니다. 키요시 히카와는 엔까 스타에서 시작하여 락, 댄스, 심지어는 중성적 이미지까지 시도하며 엔까의 새 길을 열었습니다. 최근 젊은 음악 팬들 사이에서는 엔까적 감성을 기반으로 한 ‘시티팝’이나 ‘쇼와풍 레트로’ 음악이 유행하면서, 과거 음악에 대한 재조명도 활발합니다.
여기에 더해 트로트와 엔까는 점점 국경을 넘는 음악으로 변화하고 있습니다. 유튜브, 넷플릭스, SNS를 통해 트로트 음악은 동남아, 중화권, 심지어 유럽권까지 확산되고 있고, 엔까 역시 오타쿠 문화 및 일본 전통문화의 재발견 붐을 타고 해외 팬을 확보하고 있습니다. 특히 감정을 중시하는 콘텐츠 소비 성향이 높아지면서, 이들 감성 중심 음악은 새로운 시장을 열고 있습니다.
최근에는 트로트와 엔까를 전통예술로 바라보는 움직임도 확산되고 있습니다. 문화재 지정은 아니지만, 문화원이나 지방자치단체에서는 트로트와 엔까 관련 자료의 보존과 공연 활성화 사업을 통해 그 유산적 가치를 알리려 노력하고 있습니다. 대학 강단에서도 이들 장르에 대한 학술적 연구가 늘고 있으며, 사회문화학, 민속학, 대중음악학의 새로운 연구 주제로 자리 잡고 있습니다.
이는 단순한 유행을 넘어서, 트로트와 엔까가 가진 정체성의 깊이와 역사적 가치가 재발견되고 있음을 의미합니다. 문화란 결국 사람의 감정과 시간이 빚어낸 집합체입니다. 트로트와 엔까는 그것을 가장 인간적인 목소리로, 가장 오래된 멜로디로 들려주고 있는 것입니다.
결국 트로트와 엔까는 전통의 음악이면서도 시대의 변화를 품은 살아 있는 문화입니다. 그들은 단지 과거를 재현하는 것이 아니라, 미래를 위한 감정의 언어로 다시 태어나고 있습니다. 그 속에서 우리는 과거와 현재, 그리고 다가올 내일의 감정을 노래합니다
글쓴이: 음악문화 블로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