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 차
1. 전통의 땅에 울려 퍼진 낯선 리듬
2. 전쟁, 억압, 그리고 음악이 말하는 진실
3. 새로운 세대, 새로운 소리 — 중동 재즈의 오늘
🕌 사막의 달빛 아래 재즈가 흐를 때
1. 전통의 땅에 울려 퍼진 낯선 리듬
중동은 오랜 시간 동안 음악적 전통이 강하게 뿌리내린 지역이다. 아랍권의 클래식 음악인 마카암(Maqam)은 수세기 동안 종교적·철학적 사유와 함께 진화해왔다. 음과 음 사이의 미세한 미묘함(quarter tone), 독특한 선율 구조, 반복되는 리듬은 중동 음악 특유의 깊이와 묵직함을 만들어낸다. 이러한 전통이 단단하게 구축되어 있는 문화권에 '재즈'라는 장르가 들어왔을 때, 그 파장은 미묘하면서도 특별했다.
재즈는 원래 미국 흑인 사회의 민속적·정치적 경험에서 태어난 음악이다. 자유로운 즉흥 연주, 블루스의 정서, 리듬의 해체는 억압과 저항의 서사를 안고 있다. 그렇기에 재즈는 단순한 '서양 음악'이 아닌, 하나의 사회적 언어였다. 중동에서 이 낯선 언어는 처음에는 '이방인의 언어'로 받아들여졌지만, 곧 많은 음악가들이 그 안에서 자신들의 감정과 현실을 투영할 수 있는 틈을 발견하기 시작한다.
20세기 중반, 레바논과 이집트를 중심으로 한 문화적 르네상스 속에서 재즈는 조심스럽게 소개되었다. 특히 1960년대 베이루트는 중동의 문화 수도로 불리며, 유럽과 아시아의 음악이 교차하는 공간이 되었다. 대학가 주변에는 소규모 클럽들이 생겨났고, 라디오에서는 아르망 함메르나 스탄 게츠의 음악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초기에는 주로 프랑스 식민 통치를 겪은 나라들을 중심으로 소개되었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재즈는 점점 더 중동인의 정서와 감각에 맞춰진 형태로 변형되기 시작한다.
한 가지 주목할 점은, 중동의 음악가들이 재즈를 단순히 '따라하는 것'에 머물지 않았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이집트의 전설적인 우드(Oud) 연주자 하잇함 라비(Haytham Rabi)는 우드를 색소폰처럼 자유롭게 다루며, 아랍의 전통 선율을 재즈의 즉흥 연주 구조 안에 녹여냈다. 그의 연주는 마치 아침 기도 소리처럼 경건하면서도, 어딘가 현대적 감각으로 가득 차 있다.
재즈는 그렇게 중동의 전통 음악과 만났고, 그 만남은 단순한 퓨전이 아닌 새로운 언어의 탄생으로 이어졌다.
2. 전쟁, 억압, 그리고 음악이 말하는 진실
중동의 많은 국가는 오랜 시간 정치적 불안과 사회적 갈등을 겪어왔다. 팔레스타인, 시리아, 이란, 이라크… 이 지역의 뉴스는 언제나 비극적인 소식으로 가득하지만, 그 속에도 음악은 존재한다. 아니, 오히려 그 안에서 음악은 더 강력한 진실을 말하고 있다. 그리고 재즈는 그 표현의 중심에 있다.
팔레스타인의 피아니스트 파리드 오데(Farid Odeh)는 자신의 조국이 처한 현실을 재즈로 표현하는 대표적인 인물이다. 그는 뉴욕에서 재즈를 공부한 후 고국으로 돌아와, 베들레헴의 벽 앞에서 콘서트를 열었다. 탱크의 소리와 군화의 발소리 사이에서 흘러나오는 그의 피아노 선율은 단지 음악이 아니라, 살아 있는 외침이었다. 그는 말했다. "내 연주는 저항이며, 동시에 치유다."
이란에서도 비슷한 움직임이 있다. 이슬람 혁명 이후 서양음악에 대한 강력한 통제가 있었지만, 젊은 세대는 유튜브와 VPN을 통해 재즈를 접하기 시작했다. 2010년대 이후 이란의 지하 음악 신(Scene)은 폭발적으로 성장했고, 그 중심에는 실험적 재즈 밴드들이 있었다. 이들은 타블라, 산투르 같은 전통 악기와 색소폰, 드럼을 결합하며 완전히 새로운 음악을 만들어냈다. 때로 그 음악은 부드럽고 멜랑콜리하며, 때로는 격렬하고 날이 서 있다.
이러한 음악들은 종종 검열을 피하기 위해 해외에서 녹음되고, 스트리밍 플랫폼을 통해 전 세계에 퍼진다. 특히 베를린, 파리, 이스탄불 등지로 이주한 중동 출신 재즈 음악가들은 망명지에서 더 큰 창작의 자유를 누리며 활동 중이다. 이들의 음악은 국적을 초월하고, 억압의 무게를 이야기하며, 동시에 사랑과 삶에 대한 찬가로도 작용한다.
재즈는 원래부터 경계를 허무는 음악이었다. 중동에서 그것은 더욱 치열하고 절실한 방식으로 구현된다. 소리 하나하나에 투영된 역사와 감정, 눈물과 희망이 바로 중동 재즈의 정체성이다.
3. 새로운 세대, 새로운 소리 — 중동 재즈의 오늘
오늘날 중동의 재즈는 더 이상 '서구의 수입품'이 아니다. 오히려 중동 뮤지션들이 세계 재즈 신(Scene)의 흐름을 바꾸고 있다. 2000년대 이후, 많은 중동 출신 음악가들이 국제 재즈 페스티벌에 초청되었고, 자신들만의 독창적인 스타일로 주목받고 있다.
레바논의 트럼펫 연주자 이브라힘 마알루프(Ibrahim Maalouf)는 그 대표적 인물이다. 그는 전통 아랍 음악에서 사용하는 'quarter tone'(4분음)을 표현할 수 있는 특수한 트럼펫을 개발했고, 이를 통해 서양과 동양의 경계를 허무는 연주를 선보이고 있다. 그의 음악은 재즈이면서도 아랍의 정서를 고스란히 담고 있으며, 때로는 락이나 일렉트로닉 음악과도 결합된다.
또한 요르단, UAE, 사우디아라비아에서도 젊은 재즈 연주자들이 등장하고 있다. 특히 최근 몇 년간 사우디의 문화 개방 정책 이후 리야드와 제다에는 재즈 클럽이 생겨나기 시작했으며, 여성 연주자들의 활동도 두드러진다. 과거에는 상상할 수 없던 풍경이다. 베일을 쓴 여성 드러머가 무대에 올라 박수를 받는 순간은, 단순히 음악을 넘어 사회 변화의 상징처럼 느껴진다.
이러한 흐름은 교육과도 맞물려 있다. 아부다비, 도하, 카이로 등에는 정식 재즈 아카데미가 생겼고, 유럽에서 돌아온 음악가들이 젊은 세대를 가르치고 있다. 이들은 "재즈는 단지 음악이 아니다. 삶의 태도다"라고 말하며, 자유로운 사고와 창작을 장려한다.
또한 넷플릭스, 유튜브, 스포티파이와 같은 글로벌 플랫폼 덕분에 중동의 재즈는 전 세계 음악 팬들과 즉시 연결되고 있다. 당신이 서울에 있든, 뉴욕에 있든, 클릭 몇 번이면 시리아 출신 색소포니스트의 음악을 들을 수 있는 시대다. 그 음악은 국경도, 언어도 필요 없이 당신의 가슴에 와 닿는다.
🎶 마치며 — 낯선 음악, 그러나 가장 인간적인 이야기
중동과 재즈. 얼핏 어울리지 않을 것 같은 조합이다. 하지만 깊이 들여다보면, 그 둘은 놀라울 만큼 닮아 있다. 복잡한 역사, 억압과 갈망, 슬픔과 희망, 그리고 인간이라는 존재에 대한 탐구. 이 모든 것은 재즈의 본질이자, 중동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재즈는 오늘도 텔아비브의 거리에서, 카이로의 지하 스튜디오에서, 이스탄불의 작은 카페에서 울려 퍼지고 있다. 어떤 소리는 항의이고, 어떤 소리는 기도이며, 또 어떤 소리는 단순한 사랑의 고백이다.
중동의 재즈는 이제 세계 무대의 일부가 되었다. 그리고 그 안엔, 모래바람처럼 거칠고도 아름다운, 아주 인간적인 진심이 담겨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