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 차
1. 🎶 재즈에 인생을 걸다 – 이정식의 삶과 음악의 시작
2. 🎷 음 하나에도 진심을 담다 – 이정식의 음악 철학과 작품 세계
3. 🎓 재즈의 정신을 전하다 – 교육자, 선배, 선구자로서의 이정식
– 한국 재즈의 정신, 그 이름을 기억하다
1. 🎶 재즈에 인생을 걸다 – 이정식의 삶과 음악의 시작
“누구처럼 되고 싶은 마음은 없었어요.
다만, 내가 들은 이 음악을 평생 붙잡고 살아야겠다는 마음은 있었죠.”
– 이정식
우리가 어떤 음악을 만나게 되는 순간은, 결국 어떤 인생과 마주하게 되는 시간이다. 이정식이라는 이름의 색소포니스트를 안다는 건 단순히 ‘재즈 뮤지션’을 아는 게 아니다. 그것은 한국에서 재즈라는 말을 처음 꺼낸 세대, 그 개척의 고통과 아름다움을 안다는 것이다.
이정식은 1954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그가 청소년 시기를 보낼 무렵, 한국 사회는 막 경제개발이 한창이던 산업화의 격랑 속에 있었다. 문화예술은 삶의 중심이 아니었고, 음악은 생계 수단이거나 취미에 불과했다. 게다가 ‘재즈’는 당시 일반 대중에게 지극히 낯선 단어였다. 클래식도 생소한 판에, 즉흥과 감정의 음악이라니.
하지만 그런 시대에도 음악이라는 운명을 피할 수 없었던 사람들이 있었다. 이정식도 그런 이 중 한 명이었다.
🎷 클래식에서 재즈로, 낯설고도 치열한 전환
이정식은 한양대학교 음악대학에서 클래식을 전공했다. 당시에는 색소폰이 클래식 악기로도 제대로 자리잡지 못했기에, 정통 연주자에게도 여전히 마이너한 악기였다.
그런 그가 재즈라는 미지의 세계로 들어간다는 것, 그건 단순한 장르 전환이 아닌 인생의 궤도를 바꾸는 모험이었다.
이정식이 재즈를 처음 접하게 된 건 우연한 경험이었다.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던 미국 색소포니스트들의 연주를 들었을 때, 내가 지금까지 알던 음악이 아니었어요. 숨결 하나로 공간이 바뀌는 느낌이었달까…”
그렇게 시작된 재즈와의 인연은, 곧 그의 삶을 통째로 잡아당겼다.
🏙 미8군 클럽, 길거리, LP… 그리고 독학
1970~80년대 한국에서 재즈를 배운다는 건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다.
음악학교엔 교재도 없고, 악보도 없었으며, 심지어 이론서조차 없었다. 모든 것은 소리로 전수되어야 했다.
그는 미8군 클럽에 직접 찾아가 미국 연주자들을 보고, 듣고, 눈으로 악보를 외웠다.
길거리 음반 가게에서 구한 LP, 비싼 값에 복사해온 테이프가 그의 교과서였다.
그 시절 이정식은 하루에도 수십 번씩 같은 곡을 반복해서 들으며 프레이즈 하나하나를 채보했고, 그걸 자신의 스타일로 바꿔보기 위해 무한히 불었다.
그렇게 그는 **‘소리로 배우는 학교’**에서 스스로를 단련시켰다.
그리고 그는 결심한다.
“이대로는 한계가 있다. 나는 이 음악을 제대로 만나봐야겠다.”
그렇게 그는 뉴욕행 비행기에 오른다.
🛫 뉴욕에서의 시절 – 진짜 재즈를 만나다
1985년, 그는 음악 유학이라는 이름도 없이 뉴욕에 도착했다.
무작정 클럽을 찾아다니며 연주자들과 교류하고, 거리에서 연습하고, 때론 무대에서 용기 있게 즉흥으로 뛰어들었다.
그는 말한다.
“그곳에서 진짜 재즈를 처음 들었고, 처음 이해했고, 처음 살아봤다.”
그가 뉴욕에서 경험한 재즈는 단순한 음악이 아니었다.
그것은 정치, 인종, 고통, 자유, 저항 같은 인간의 깊은 문제를 품은 삶의 언어였다.
밤마다 연주자들과 어울리고, 새벽까지 클럽에서 사운드를 주고받으며, 그는 한국에서 배울 수 없었던 **‘영혼으로 소통하는 음악’**을 체득했다.
그리고 그는 결심한다.
“이제 한국에 돌아가, 이 음악을 한국어로 말해보겠다.”
2. 🎷 음 하나에도 진심을 담다 – 이정식의 음악 철학과 작품 세계
이정식의 색소폰은 감정을 쥐고 흔드는 소리다.
단순히 멜로디를 연주하는 것이 아니라, 마치 누군가의 기억을 끄집어내는 듯한 힘이 있다.
그는 기교나 테크닉보다는, 늘 **‘감정의 진정성’**을 중시해왔다.
“나는 곡을 연주할 때 그 순간의 느낌을 믿어요. 악보에 적힌 걸 그냥 재현하는 건 음악이 아니라 낭독이죠.”
그 말처럼, 그의 연주는 연주 그 자체가 메시지다.
🎧 이정식의 대표 앨범 세계
1) 《이정식 퀸텟》(1993)
그의 첫 정규작. 비밥 스타일을 기반으로 한 전통적인 재즈 퀸텟 사운드에, 한국적 선율과 리듬 감각이 자연스럽게 스며들어 있다.
"마음속의 창", "시인의 하루", "노을 아래에서" 등의 곡에서는 서정적인 감성과 즉흥의 격정이 아름답게 교차된다.
특히 "마음속의 창"은 한국 재즈 역사상 가장 완성도 높은 오리지널 작곡 중 하나로 손꼽힌다.
2) 《Ballads for Saxophone》(2001)
재즈 스탠다드를 중심으로 구성된 발라드 모음집.
"My One and Only Love", "You Don't Know What Love Is" 등 고전적인 명곡들이 그의 연주 아래에서 새롭게 태어난다.
그의 발라드는 텅 빈 공간이 살아있는 연주다. 쉼표, 숨소리, 미묘한 진동 하나까지 감정을 불러일으킨다.
3) 《Colors of Korea》(2006)
이 앨범은 이정식 음악 세계의 결정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국악과 재즈의 결합을 시도하며, 진정한 의미의 ‘K-Jazz’를 실현했다.
"한오백년", "정선 아리랑", "밀양 아리랑" 등의 민요는 그의 해석을 거쳐 전혀 다른 음악으로 재탄생한다.
색소폰은 때론 대금처럼 울리고, 때론 피리처럼 짙은 서정을 담는다.
🎶 그만의 프레이즈 – 즉흥과 사유의 소리
이정식의 연주는 감정이 앞서고, 생각이 따라오는 음악이다.
즉흥 연주에서 그는 늘 이야기하듯 연주한다.
대부분의 솔로는 마치 한 편의 시처럼 느껴진다. 시작과 끝, 고조와 여운, 그리고 나지막한 속삭임까지 갖췄다.
그가 자주 사용하는 음계는 한국의 계면조(다소 블루지한 마이너 스케일) 기반이며, 블루스 스케일과 전통 재즈 프레이징이 융합된 형태다.
덕분에 그의 연주는 어디서든 **‘이정식의 소리’**로 바로 알아챌 수 있다.
3. 🎓 재즈의 정신을 전하다 – 교육자, 선배, 선구자로서의 이정식
“연주는 내가 살아있다는 증거고,
가르침은 내가 살아가는 이유다.”
– 이정식
이정식은 연주자로서도 위대하지만, 교육자로서의 기여 또한 빼놓을 수 없다.
그는 한국 재즈 교육의 뼈대를 세운 사람 중 한 명이다.
서울예대, 동아방송예술대, 호원대 등지에서 수십 년간 후학을 길러냈으며, 지금 활동 중인 수많은 재즈 뮤지션들이 그의 제자 혹은 영향권에 있는 인물들이다.
🧑🏫 ‘재즈를 어떻게 가르칠 것인가’에 대한 철학
이정식은 ‘이론 중심’의 음악 교육에 대해 늘 회의적이었다.
그는 말한다.
“재즈는 감정의 언어예요. 정답이 아니라 방향이 필요하죠.”
그래서 그는 학생들에게 표현의 이유를 먼저 고민하게 한다. 음을 왜 고르는가, 그 순간 어떤 감정을 전달하려 하는가.
그는 학생들에게 반드시 발로 무대에 서게 했다.
작은 카페든, 거리 공연이든, 사람 앞에서 음악을 내는 순간을 통해서만 진짜 재즈를 배울 수 있다고 믿었다.
🎷 그의 제자들, 그리고 유산
지금 활발히 활동 중인 색소포니스트 신현필, 조한결, 이정식 Jr. 등은 모두 그의 직접적 영향을 받았다.
신현필은 전통 재즈에 민속음악을 융합하는 프로젝트를 이끌고 있으며, 조한결은 미국과 한국을 오가며 독보적인 현대 재즈를 실험하고 있다.
이정식 Jr.는 아버지와 다른 세련되고 젊은 스타일로 새로운 세대와 소통 중이다.
그들의 음악엔 공통적으로 **‘말하듯 연주하는 감성’**이 존재한다.
이건 기술이 아닌 태도의 전수, 바로 이정식의 가장 위대한 유산이다.
🌍 한국 재즈의 국제화 – 그는 언제나 연결고리였다
이정식은 일본, 미국, 프랑스 등 여러 나라에서 공연하고, 한국 뮤지션의 해외 진출을 꾸준히 돕는 역할도 했다.
그의 공연은 단순한 쇼가 아니라 한국 재즈의 진심을 전달하는 무대였다.
그는 ‘K-Jazz’라는 단어가 생기기도 전부터, 이미 그 정신을 음악에 담아온 인물이다.
📝 마무리하며 – 그는 여전히 연주 중이다
이정식은 여전히 활동 중이다.
그의 연주는 더 단단해졌고, 더 절제되었으며, 더 깊어졌다.
그는 더 이상 빠른 음을 불지 않는다. 그 대신, 한 음을 더 오래, 더 진하게, 더 인간적으로 연주한다.
이정식의 음악은 단순한 소리가 아니다.
그것은 삶을 건너온 자만이 낼 수 있는 소리의 문장이다.
우리가 그의 음악을 듣는 이유는, 그 소리에 우리의 마음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그는 이제 단지 한 명의 뮤지션이 아닌, 한국 재즈의 역사이자 정신이다.
그리고 그의 색소폰은, 앞으로도 누군가에게 첫 재즈의 기억으로 남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