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 차
1. 속도를 늦추는 음악, 재즈
2. 도로 위의 선율: 드라이브와 재즈의 궁합
3. 삶을 더 깊이 있게 즐기는 방법
1. 속도를 늦추는 음악, 재즈
언제부터였을까. 우리는 점점 빠른 것에 익숙해져 버렸다. 고속 인터넷, 배달의 민족, 빠른 의사결정, 단축키, 2배속 영상 감상까지. 삶의 모든 것이 ‘빨리빨리’ 돌아가는 세상에서, 재즈는 그런 흐름을 거스르는 음악이다. 어쩌면 재즈는 우리를 ‘잠깐’ 멈추게 해주는 유일한 예술인지도 모른다.
드라이브를 하며 재즈를 듣기 시작한 건 아주 우연한 계기였다. 어느 비 오는 날, 차 안에 혼자 앉아 있었고, 라디오에서는 빌 에반스의 피아노 선율이 흐르고 있었다. 창밖의 풍경은 느리게 흘렀고, 차창에 맺힌 빗방울은 하나의 리듬처럼 타악기를 두드리듯 잔잔하게 울렸다. 나는 그 순간, 재즈가 ‘속도를 늦추는 음악’이라는 걸 온몸으로 느꼈다.
재즈는 처음엔 낯설다. 멜로디가 어디로 튈지 모르고, 한 곡 안에서도 여러 악기가 제멋대로 움직이는 것 같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 자유로움 속에서 균형을 느끼게 된다. 드라이브와 너무 닮았다. 정해진 길을 따라가면서도, 운전자의 손끝에 따라 얼마든지 방향을 바꿀 수 있는 자유. 그 여유 속에서, 재즈는 묘한 위로를 건넨다. 아무것도 정해진 대로 흘러가지 않아도 괜찮다고.
바쁜 하루의 끝, 혹은 주말 아침의 고요한 출발에,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부드러운 색소폰 소리는 마음을 적신다. 차창 밖의 풍경이 하나하나 살아나고, 길 위의 바람은 악보 위를 부유하는 음표처럼 느껴진다. 재즈는 그렇게 우리 안의 불안을 잠재우고, 잊고 있던 감각을 깨운다.
가끔은 아무 말도 없이 차에 올라, 가장 덜 붐비는 길을 선택하고, 천천히 가속페달을 밟는다. 재즈는 그때마다 마치 "잘했어, 그렇게 천천히 가도 괜찮아"라고 말해주는 것만 같다. 한 음 한 음, 악기들이 서로를 존중하며 나아가는 방식은 인간관계에서도 배울 점이 많다. 누군가가 말을 끝낼 때까지 기다리는 인내, 나의 소리를 너무 키우지 않는 절제, 그리고 서로의 즉흥성을 인정하고 보듬어주는 포용.
그렇게 나는 재즈와 드라이브를 통해 또 다른 나를 만난다. 한때는 늘 초조했고, 목적지에만 집중했던 내가 이제는 "지금"을 더 사랑하게 되었고, 아무 이유 없이도 차를 몰고 나설 수 있게 되었다. 재즈는 나를 바꾸었다. 그리고 드라이브는 그 변화를 담아내는 여정이 되었다.
2. 도로 위의 선율: 드라이브와 재즈의 궁합
차 안은 작지만 완벽한 공간이다. 특히 혼자 있는 차 안은 더더욱 그렇다. 누군가와 나누는 대화도 없고, 방해받을 걱정도 없다. 나와 내 생각, 그리고 내 취향으로 채워진 음악만이 존재하는 작은 세계. 그 공간에서 재즈는 놀라울 정도로 잘 어울린다. 그것도 고속도로보다는 국도, 도심보다는 한적한 바닷길이나 산길에서.
드라이브를 할 때 우리는 자연스럽게 리듬을 느낀다. 바퀴가 지면을 굴러가는 소리, 깜빡이 소리, 와이퍼의 박자, 심지어는 엔진의 저음까지. 이 모든 것이 재즈의 즉흥성과 맞닿아 있다. 리듬이 일정하지 않아도, 오히려 그 불규칙성이 더 큰 집중과 몰입을 불러온다. 마치 색소폰이 갑자기 불쑥 튀어나왔다가, 조용히 사라지는 것처럼.
많은 이들이 드라이브 음악으로 팝송이나 EDM을 떠올리지만, 재즈는 훨씬 더 섬세한 경험을 제공한다. 음악이 풍경을 배경으로 만들어주기도 하고, 때론 풍경이 음악을 덧칠해주기도 한다. 예를 들어, 푸른 바다 옆을 달릴 때는 차분한 보사노바 재즈가 어울리고, 낙엽이 떨어지는 산길에서는 클래식 재즈의 정통 색소폰이 그 분위기를 완성시켜준다.
플레이리스트를 짜는 재미도 크다. 척 맨지오니의 "Feels So Good", 노라 존스의 "Don’t Know Why", 그리고 세실리아 스탈린의 “Afternoon in Paris” 같은 곡들을 한 줄로 엮으면, 그 자체로 하나의 로드무비가 된다. 내가 밟는 액셀의 강약에 따라, 음악도 리듬을 타고 반응하는 것만 같다. 창문을 조금 열고, 햇살이 스며드는 시트 위에 손을 올리고 있으면, 마치 세상 어디에도 속하지 않은 사람처럼 자유롭고, 온전히 내 시간에 몰입한 듯한 감각이 밀려온다.
도시를 벗어나 자연을 향해 달릴 때, 특히 일몰 시간과 맞물린 드라이브에서 재즈는 진가를 발휘한다. 해가 천천히 지고, 하늘이 붉게 물들며, 공기마저 서늘해지는 그 순간. 음악과 풍경이 하나가 되어 마음을 어루만진다. 어떤 날은 세상의 소음이 가슴을 짓누를 때가 있다. 그럴 때 차에 올라 재즈를 튼다. 놀랍게도, 10분도 지나지 않아 세상이 조용해진다. 그대로 멈춰 있던 생각들이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하고, 내가 느껴야 할 감정들이 하나씩 올라온다.
드라이브는 멀리 떠나는 게 목적이 아니다. 가까운 거리를 가더라도, 그 안에서 내가 ‘나답게’ 있는 것이 중요하다. 그때 재즈는 더없이 좋은 친구가 되어준다. 누구보다 조용히, 그러나 깊게 나를 이해해주는 음악. 그런 음악과 함께라면, 목적지는 중요하지 않다. 오히려 그 여정이 더 특별해진다.
3. 삶을 더 깊이 있게 즐기는 방법
드라이브와 재즈. 얼핏 보면 별로 관련이 없어 보이지만, 이 두 요소가 만날 때 우리가 얻게 되는 건 ‘속도의 재발견’이다. 우리는 너무 많은 시간을 목적지에 도달하는 데만 집중하며 살아간다. 하지만 재즈는 그 여정을 즐기게 해준다. 드라이브 또한 목적지보다 과정 그 자체가 더 아름답다는 걸 가르쳐준다.
한적한 시골길에서, 차창을 열고 바람을 맞으며 재즈를 듣는다는 건 단순한 낭만이 아니다. 그것은 하나의 ‘삶의 태도’다. 더 이상 시간에 쫓기지 않겠다는 선언이자, 내 감정과 감각을 다시 불러들이겠다는 회복의 신호다. 고요한 음악과 함께 흘러가는 도로 위에서, 우리는 ‘지금 여기’에 몰입하게 된다. 그것이 바로 삶을 깊이 있게 즐기는 방식이다.
재즈는 우리에게 말해준다. 인생은 악보 없이 연주되는 즉흥 연주와 같다고. 실수해도 괜찮고, 틀려도 자연스럽다. 중요한 건 그 안에서 자신만의 리듬을 찾는 것이다. 드라이브 또한 그렇다. 빠르게 달릴 필요도, 무조건 앞서갈 필요도 없다. 나에게 가장 잘 맞는 속도, 그리고 나를 가장 편안하게 해주는 길을 찾는 여정일 뿐이다.
결국 드라이브와 재즈는 삶을 바라보는 하나의 철학이 된다. 어디로 가느냐보다, 어떻게 가느냐가 더 중요한 철학. 목적지가 아니라 여정 그 자체를 사랑하는 삶. 그리고 그 삶 속에서, 조용히 흘러나오는 재즈 한 곡이 우리를 조금 더 깊이 있는 사람으로 만들어줄지도 모른다.
삶은 짧고, 우리는 너무 자주 그 사실을 잊는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마감과 미팅, 계획과 보고서에 쫓기며 하루를 보내다 보면, 언제 마지막으로 자신만의 시간을 가졌는지조차 기억이 나지 않는다. 하지만 재즈와 드라이브는 그 시간을 되찾는 방법이 될 수 있다. 아무 목적 없이 떠나는 오후의 짧은 드라이브, 그리고 그 안에서 울리는 차분한 트럼펫 소리. 그것은 단순한 휴식이 아니라, 일종의 명상이다.
매일 반복되는 삶 속에서, 우리가 가끔 멈추고 바라봐야 할 것은 바로 그 사소한 여유다. 재즈를 들으며 달리는 도로 위에서, 우리는 다시 삶을 느끼고, 나를 돌아보고, 감사하게 된다. 그것이 바로 우리가 그토록 갈망하던 진짜 '여행' 아닐까.
그리고 오늘. 혹시나 당신도, 조금은 지쳤다면. 차 안에 들어가 조용히 재즈 한 곡을 틀어보기를. 그 음악은 아마도 당신을 아주 멀리, 아주 깊은 곳까지 데려다줄 것이다.